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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송리마애불

  • 01낙동강 사람들의 기원 "낙동강 생송리"
    생송리(生松里)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생물리와 송상리를 합해 만들어진 이름이라 한다. 나지막한 산에 소나무가 많아 생송이라고도 한다. 생송에는 많은 것이 많다. 비옥한 토지의 논이 많고, 마을도 많고, 인구도 많은 편이다. 그리고 유난히 충과 효의 역사가 깊은 의성에서 더욱 유난히 효자 효부가 많이 난 마을이기도 하다.
  • 02생송리 마애불(1)
    낙정마을은 1400년대 초 윤관(尹管)이란 사람이 개척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낙정마을은 그보다 더 오래전 ‘고려사’에 낙동역(洛東驛)으로 등장한다. 근 천 년에 이르는 역마을인 것이다. 낙정은 원래 낙동강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낙동이라 했는데, 약 200년 전 마을에 좋은 우물이 생겨나면서 ‘낙정(洛井)’이 되었다.
    낙정리의 옛 나루터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200m쯤 오르면 생송리에 든다. 강변은 20m 높이의 절벽이다. 그 절벽에 기대 부처님이 앉아 계신다.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흐르는 낙동강과 옛 나루의 뱃길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다.
  • 03생송리 마애불(2)
    부처님이 발견된 것은 2010년 10월 낙단보의 건설 현장 이었고 절벽은 두꺼운 흙으로 덮여 있었다. 인부는 암반 조사를 위한 시험 천공 중 흙벽의 일부가 바위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흙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7m 정도를 파내려가던 그의 눈에 곡선의 새김이 있는 바위 면이 드러났다. 조금 더 파 보자, 손가락이 보였다. 부처의 암각이었다. 공사는 전면 중지되었다.
    작업을 했던 인부는 이렇게 기억한다. 유난히 뚫리지 않던 부분이 있었다고. 그게 부처의 얼굴이었다고. 생송리 마애보살좌상은 그렇게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가로 5.5m, 세로 3.5m 크기의 화강암 암벽에 높이 2.2m, 너비 1.5m 부처님은 이중선으로 꽃잎을 새긴 연화대좌에 앉아 계신다. 등 뒤쪽에는 원형의 두광과 신광이 얕게 새겨져 있다. 얼굴은 눈과 입이 선명하다. 가슴께로 들어 올린 오른손은 줄기가 제법 긴 연꽃 한 송이를 쥐고 있다. 배 아래로 편안히 내린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의 수인을 표하고 있다. 부처님은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계신다. 세 개의 산 모양이 새겨진 보관으로 흔치 않은 예라 한다.
  • 04생송리 마애불(3)
    송리 마애불은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생송리 마애보살좌상은 10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며 낙동강 나루터를 안전하게 건너기 위한 기원을 담아 지역의 장인이 새겼을 거라 여겨진다. 부처님은 낙동강을 오가던 사람들, 강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의 수많은 소원을 들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오래 전 강에서 고기잡이를 할 때에도 한 번씩 뵈었던 부처님이라고 한다. 가까이에 한 분이 더 계셨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머리맡 도로의 어느 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만이 분분하다.
  • 05효자ㆍ효부마을(1)
    낙단보에서 912번 도로를 타고 강을 거슬러 1㎞쯤 안동 권씨 권목월(權木月)의 효부각이다. 1887년에 태어난 그녀는 어릴 때부터 성품과 행동이 단정해 널리 칭찬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녀는 양종기(梁宗基)와 혼인하여 생송에 살게 되었고, 집은 몹시 어려웠지만 시어른을 극진히 모셨다 한다.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 해지자 손과 발이 되어 효성을 다했다. 그녀의 효는 마을을 넘어 군수에까지 전해져 표창이 내려졌고 이후 비각이 세워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남은 어머니를 한결같은 효행 으로 모셨는데, 여든의 노모가 앞을 못 보게 되었을 때에는 언제나 곁을 지키며 부름에 따르니 보는 이들마다 감탄했다 한다. 1965년 어머니가 87세로 돌아가셨을 때 그 자신도 일흔의 노구였다. 3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어머니의 묘를 돌본 그는 1971년 세상을 떠났다. 효자각은 1982년에 세워졌다.
  • 06효자ㆍ효부마을(2)
    김동문 효자각에서 1㎞ 거리에 또 정려각이 나타난다.
    권상두(權相斗) 효자각이다. 1870년 태어난 권상두는 어릴 때부터 부모 공양에 빈틈이 없어 마을의 교풍(矯風)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묘를 지키며 눈물을 흘렸는데, 밤이면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보살피며 함께 시묘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를 지키는 3년을 큰 구렁이가 함께했다고도 한다. 효자각은 1926년에 세워졌다.
  • 07효자ㆍ효부마을(3)
    생송의 끄트머리, 단밀면 소재지를 앞둔 길가에는 김형석 (金炯石)의 정려각이 있다. 1848년생인 그는 단종 복위 운동 때 죽은 김문기의 후예로 충북 영동에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이 마을로 왔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힘이 무척 세었다고 한다. 하루는 집에 들어온 호랑이를 아버지와 함께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때 아버지는 큰 상처를 입었는데, 그가 입으로 고름을 빨아 낫게 하니 모두들 감탄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남은 어머니가 병을 앓게 되었을 때는 대소변 처리와 빨래를 직접 하였고, 병세가 위급할 때에는 손가락을 깨물어 수혈했다. 어느 날 소고기가 먹고 싶다는 어머니의 말에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구할 수 없었다. 그가 버드나무 아래 앉아 자신의 정성이 부족한 탓이라 한탄하자 까마귀 들이 울면서 몰려와 나무 위를 맴돌았는데, 거기에는 소고기 한 꾸러미가 달려 있었다 한다. 사람들은 이런 기이한 일들이 모두 그의 효성 덕분이라고 칭찬했다.
    생송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은, 이 효자 효부의 비각들이 점점이 이어진 길이다. 비석들은 크지 않다. 비각들은 으리 으리하지 않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같이 단정하고 정갈한 것이 놀랍다. 이들의 기념비는 이 세상에 넘치는 모든 기념비 중 가장 순정하고 높은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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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24-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