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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사

  • 01무심히 스치는 바람곁에 "천년고찰 대곡사(大谷寺)(1)"
    대곡사는 고려 공민왕 17년(1368) 인도 승려 지공(指空) 선사가 원나라와 고려를 다니면서 불법을 펼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절이라 전해진다. 하지만 이보다 더 오래 전 신라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세운 목적에 따라 대국사(大國寺)라 이름 지었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1687년(숙종 13) 태전(太顚)이 중건했다.
    중건 당시 이곳 태행봉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100리나 되는 긴 계곡이 보인다 해서 대곡사(大谷寺)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 02무심히 스치는 바람곁에 "천년고찰 대곡사(大谷寺)(2)"
    대곡사는 고려시대에는 비봉산 일대에 본원을 비롯한 9개의 암자를 지었을 정도로 융성했다. 그러나 이후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근래 들어 “1950년대 이전 까지만 해도 대곡사에서 ‘화전(花煎) 놀이’가 성했다”는 말이 전해올 뿐이다. 대곡사는 예부터 ‘달빛이 아름다운 절’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대곡사를 중심으로 숱한 시인묵객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달빛의 비경에 빠져 대곡사에 머물던 나그네들이 지은 시들이 책을 엮을 만큼 많아 한시집(漢詩集)이 나오기도 했다.
  • 03범종루
    입구의 길 양쪽에 선 석상을 지나면 범종루(梵鐘樓,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61호)이다. 오래된 단청이 빛이 바래 고색 창연하다.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 규모인 2층 누각이다. 다포 양식으로 외부로 뻗쳐 나온 구조에 연꽃을 조각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하나씩 놓은 반면, 가운데 칸에는 공포를 배치하지 않은 점도 특이하다. 대웅전의 조각 수법을 모방한 것일까. 그렇다면 대웅전보다 시대가 약간 떨어지는 조선 후기의 건축물인 셈이다. 누각 안에 안치했던 종은 예전에 예천 용문사로 가져갔다고 한다. 지금은 근래에 새로 조성한 범종과 목어ㆍ운판ㆍ법고가 2009년 새로 지은 옆의 종각으로 옮겨져 있다.
  • 04명부전
    범종루를 통과해 계단을 올라서자 바로 절의 중심인 마당이다.
    명부전에 들른다. 명부전은 건립연대가 불확실하지만 오량과 맞배, 그리고 겹치마 집으로 봐서 17~18세기 형식이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시왕, 직부, 사자, 판관, 녹사, 금강역사상이 봉안되어 있다. 특히 양쪽 금강역 사상의 퉁방울눈을 부릅뜬 표정이 일품이다.
  • 05대웅전
    대곡사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보물 제1831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양식이다. 1687년(숙종 13)에 태전선사가 다시 중건했다. 얼른 보면 내부에는 단청이 되어 있지만 겉은 단청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단청의 흔적들이 지붕 아래 희미하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청이 빛바랜 대신, 세월의 때가 거무스레하게 덮여 있어서 예스러움을 더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돋운다.
  • 06다층석탑
    마당 복판에 다층석탑이 있다. 다층석탑(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05호)은 탑신을 점판암으로 만든 고려 초기의 청석 탑이다. 상륜부는 없어졌다. 화강암으로 된 기단부와 점판암으로 된 탑신부는 약간의 손상을 입은 상태다. 탑신부는 현재 12층이 남아 있다. 각층은 탑신석은 없고 옥개석만 놓여 있는 상태다. 각층의 옥개석은 위로 갈수록 일정한 비율로 축소되어 있다. 6층과 7층의 체감비율이 급격히 줄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있던 한 층의 옥개석이 없어진 듯하다.
    그렇다면 본래 13층이었던 셈이다.
    대곡사의 암자인 적조암은 비봉산의 중턱인 300m 고지 비탈에 자리한다. 좁은 산길을 조심스럽게 차로 더듬는다.
    소나무들이 더러 있으나, 대부분 참나무들이 빽빽해서 가을빛으로 누르스름한 풍경을 자아낸다. 가만히 보면 산 전체가 더 밝아진 듯하다. 쉬엄쉬엄 걸어 올라가면 수목림으로 가득한 산길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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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24-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