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지역특성
연혁
- 上古 時代(상고 시대) : 소문국에 속하여 아화옥, 병옥, 병산현
- 新羅 時代(신라 시대) : 경덕왕 문소군 비옥으로 개칭
- 高麗 時代 (고려 시대) : 현종 9년 상주목(尙州牧)에 속하였으며 공양왕 2년 안정현(安貞縣)과 병합
- 조선 시대(比安縣의 名稱) : 세종 3년 안정현(安貞縣)과 비옥현(比屋縣)을 통합해서 현의 명칭을 안비현(安比縣)이라 개칭했다가 2년후에 다시 비안현(比安縣)으로 고치고 현청(縣廳)의 소재지도 안정(安貞)에서 비옥(比屋)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거기에는 縣의 廳舍가 온전히 구비된 비옥이 현실적으로 타당하다는 경상감사의 장계에 따라서 조정에서 이를 가납하였다고 한다.(朝鮮王朝實錄) (比安縣의 初代 縣監 兪 讓)
- 조선 말엽(比安郡의 昇格) : 고종 32년(1895년) 6월 23일 행정구역 개편때 비안은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고 현감이 부임하는 최하급(最下級) 고을에서 획일적으로 군수가 부임하여 왔다. 또한 동시에 관할도 23부제의 실시로 대구부(大邱府)에 넘어갔다가 다음해에 13도제로 개편됨에 따라 다시 경상북도로 이관되었다. 비안 면민들에게 이 날을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현직 면장으로서 이런 제안을 드리고 싶다. "每年 6月 23日을 比安人(面民)의 날"로 制定하여 이 날을 記念하고 기리 간직하자.
- 1906년 9월 24일(雄郡의 時節) : 반포된 행정 구역 개편때에는 상주군(尙州郡)에서 옛 단밀현(丹密縣)의 옛터이던 단동(丹東), 단서(丹西), 단남(丹南), 단북(丹北)등 4개면을, 예천군(醴泉郡)에서 옛 다인현(多仁縣) 땅이던 현동(縣東), 현서(縣西),현남(縣南), 현내(縣內) 등 4개면을 移管 받고, 1909년에는 比安郡 외북면(外北面)을 의성군에 넘겨주고 그해에는 義城郡 우곡면(羽谷面)을 比安郡으로 넘겨 받았다. 18개 面으로 늘어나니 比安郡은 고을이 생겨난 이후로 가장 넓은 판도와 住民을 確保하여서 郡勢가 倍加되는 幸運을 맞았다.
- 그러나 4년 후에는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의 비극이 왔고 이어서 1914년에는 오랜 옛 고을 比安은 현서면 만을 예천군에 환속하고 나머지 전부는 의성군(義城郡)에 흡수 통합되어서 없어졌다. 이는 신라(新羅), 고려(高麗), 조선조(朝鮮)등 3조에 걸쳐서 천년을 넘도록 시행하여 오던 행정구역 제도를 전국적으로 2 ~ 3개 군씩 통합하는 일대 수술을 감행한 것이다.
- 1914년 3월 1일(郡의 悲運) : 조선 총독부 령(朝鮮 總督府 令)으로서 시행된 지방행정 구역 개편때에 오랜 옛 고을 비안군(比安郡)은 의성군(義城郡)에 통합되어 비록 식민통치 시대(植民統治 時代)에 총독부의 막강한 권력으로 쉽사리 단행된 제도이지만 천년 역대의 우리 정권에서도 그 뜻은 있었으나 전국 각 고을 토호들의 거센 반발을 이겨내지 못할 것으로 내다보고 도리없이 그냥 지내 왔던 것이다.
- 비안은 의성군에 통합된 이후에도 군 세의 반 몫을 언제나 차지하고 의엿한 자취를 남기는 서부 의성군(西部 義城郡)의 넓은 전역이다. 비안군은 1895年 6月23日부터 1914年 2月 28日(19年 8個月 7日間)까지 郡으로서 그 역할을 다 하고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지역특성
위치 및 지형
- 비안면(比安面)은 군 소재지로부터 서쪽으로 24.1KM 떨어진 전형적인 농촌 부락으로 형성된 군 서부 지역의 관문이다. 위천과 쌍계천이 합수되어 북서쪽으로 흐르면서 광활한 평야를 열어 가면서 남북으로 면 전체를 양분하였고 국도 28호선이 강줄기를 따라 연해 관통해 가며 소재지에서 군위 소보간(15호), 쌍계리에서 안계 안정간(14호) 군도가 내륙을 연결하는 간선 도로다. '97연부터 6년 계획으로 소재지에서 봉양간 우회 도로가 한창 진행중에 있으며 위천변 사리제로 부터 용남 선돌까지의 낙동강 수계 치수 사업도 추진되고 있어 지도가 바뀌고 있는 실정이다. 면의 동쪽은 안평면(安平面), 서쪽은 구천면(龜川面), 북에는 안계면(安溪面), 안사면(安寺面), 남으로는 봉양면(鳳陽面)과 군위군 소보면(軍威郡 召保面)이 경계를 이룬다.
특이사항
- 관내에는 해망산(海望山), 화장산(花藏山), 백학산(白鶴山), 화장산 성지(花藏山 城地)와 병산정(屛山亭), 백학서당(白鶴書堂), 만장사(卍長寺), 석불사 3층석탑(石佛寺 3層石塔), 석조여래 좌상(石造如來 坐像), 성자암(聖慈巖), 화장굴(花藏屈), 검암(儉巖)바위, 현산(現山) 낚시터, 병산 명사십리등(屛山 明沙十里等)과 경승지(景勝地), 문화 유적들이 산재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임란시에 가등청정이 동로(東路)를 택해 물밀듯이 함락하였으나 화장산성(花藏山城)에 모인 지역민들은 항전하고 내 고장을 지켜 현의 문서와 기물을 화장굴(花藏屈)에 훼손됨이 없이 보관하였으며 북진(北進)을 좌절(挫折)케 만들었다.
- 모두가 구명도생(求命倒生)으로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가족끼리 피난길을 떠나야 했지만 나라 위해 목숨 바치러 떠난 의혈장병(義血將兵)이 있었는가 하면 향교(鄕校)에 봉안(奉安)된 위패(位牌)를 위천(渭川)을 건너 삭벽한 간점산 성자암(肝岾山 聖慈巖) 동굴에 모셔 7년 대란 동안 봉향하고 지켜 국내에서 유일한 보존(保存)이며 고장을 빛낸 일들이다.
- 기미년 3.1운동(己未年 3.1運動) 때에는 경상북도(慶尙北道)에서 항일(抗日)의 기치를 가장 먼저 들고 일어 나 선도(先導)한 곳이며 나라가 위기(危機)에 처 할 때마다 목숨을 건 의거(義擧)가 허다하여 연면한 역사(歷史)와 더불어 빛나는 전통(傳統) 또한 자랑스럽다.
명칭유래
- 比安은 義城郡에 統合된 이후에도 郡 勢의 반 몫을 언제나 차지하고 의엿한 자취를 남기는 西部 義城郡의 넓은 全域이다.
- 반포된 지방 행정 구역 개편때에는 상주군(尙州郡)에서 옛 단밀현(丹密縣)의 옛터이던 단동(丹東), 단서(丹西), 단남(丹南), 단북(丹北)등 4개면을, 예천군(醴泉郡)에서 옛 다인현(多仁縣) 땅이던 현동(縣東), 현서(縣西),현남(縣南), 현내(縣內) 등 4개면을 移管 받고, 1909년에는 비안군 외북면(外北面)을 의성군에 넘겨주고 그해에는 의성군 우곡면(羽谷面)을 비안군으로 넘겨 받았다.
- 1909년 18개 면으로 늘어나니 비안군(比安郡)은 고을이 생겨난 이후로 가장 넓은 판도와 주민을 확보하여서 군세가 배가되는 행운을 맞았다.
-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의 비극이 왔고 이어서 1914년에는오랜 옛 고을 비안은 현서면 만을 예천군에 환속하고 나머지 전부는 의성군에 흡수 통합되어서 없어졌다. 이는 新羅, 高麗, 朝鮮등 3조에 걸쳐서 千年을 넘도록 施行하여 오던 行政區域 制度를 全國的으로 2 ~ 3개 군씩 통합하는 일대 수술을 감행한 것이다.
- 比安郡은 1895年 6月 23日부터 1914年 2月 28日(19年 8個月 7日間)까지 郡으로서 그 役割을 다 하고 이제 歷史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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