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지역특성
연혁
- 조선시대 의성군 우곡면(牛谷面)이라 불리었음
- 1909년 비안면에 편입 되었음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의성군에 편입할 시 비안군 정북면(定北面) 및 현동면(縣東面) 오가(梧佳)일부 용궁(龍宮)군 신하면(안강동 제외) 합하여 신평면으로 칭하였음
- 1963년 의성군 조례 제193호로 안사(安寺) 출장소 설치
- 1974년 12월 1일 안사 출장소 증강
- 1990년 4월 1일 안사출장소가 안사면으로 승격 분리
지역특성
위치 및 지형
- 군청 소재지로부터 서북쪽으로 25km에 위치하며 면 가운데에 남.북으로 산맥이 뻗어 두개의 골짜기를 이루며, 군에서 가장 불편한 오지임
특이사항
- 전 면적의 85%가 산으로 형성되어 농업이 주종을 이루는 1차 산업구조이며 수리시설이 불안전하고 경작규모가 영세하여 고추,마늘등 특수작물을 많이 재배함
명칭유래
교안(僑安) 1리
- 고려시대 어느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가 지리를 보고 산에서 빛을 발산하는 형상이라 한 것이 연유되어 광산이라 불리고 있음
교안(僑安) 2리
- 1572년에 성명미상의 선비가 말을 타고 여기를 지나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게 되었다. 선비는 말을 들판에 매어두고 마을 뒷산 밭개골의 바위 밑에서 비를 피하는 도중 낙뢰(落雷)에 의하여 말이 죽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말을 땅에 묻게 되었는데 그 무덤에 의하여 이 마을을 마안이라고 하고 아직도 말 무덤이 남아있다.
교안(僑安) 3리
- 하광산(下光山) : 1592년 임난시에 장석경()이라는 선비에 의하여 하광산이라고 하였음
- 절골(寺谷) : 이 지역에 절이 있었다 하여 절골이라 칭하고 있다.
교안(僑安) 4리
- 굴(窟)밭개골 : 1572년 성명미상의 선비가 말을 타고 지나다가 소낙비를 만나서 이 바위틈에서 비를 피하였음으로 굴(窟)밭개골 혹은 선비골이라고 칭한다.
- 장사(將師)바위 : 이 바위층 밑에 커다란 굴이 있었는데 말에 의하며 이 굴의 길이는 km라 하고 이 굴은 용봉천(龍峰川)에서 우는 닭소리가 들렸다고 하고 여기에 호랑이가 새끼를 치고 호랑이가 동민(洞民)을 피하기 때문에 동민이 모여서 이 굴을 매웠다 하나 지금도 굴의 흔적은 남아 있다.
- 살구재 : 일명사직고개로 칭하기도 하며 고갯마루에 살구나무가 있다하여 살구재로 칭함
덕봉리(德峰里)
- 1905년 이 마을의 김주건이라는 맹인(盲人)이 몸은 비록 앞을 보지 못하나 부모에 효도심이 강하나 효도할 길이 없었다. 이럴 때 부친(父親)이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병은 악화가 되어 사경에 이르게 되어 소원을 물은 즉 꿩고기가 먹고 싶다 하나 구할 길이 없어 밤낮으로 생각하여 불효된 마음을 억제하던 중 어느 날 변소에 있는데 난 데없이 꿩 한 마리가 날아와 김주건씨에게 안기어지니 이것은 하늘이 주신 약으로 생각하여 부친께 삶아드리게 되어 다행히도 병이 나아지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1909년 국가에서 비각을 세우게 되었다.
중율(中栗) 1리
- 조선시대(1779년)에 현(現) 중율 156-1번지에서 석불을 발견하여 지금의 절 마당에 안치하여 두고 누구든지 석불상(石佛象)에 불공을 드리게 되면 생남(生男)한다고 하였으며 석불을 안치한 곳을 절 마당이라고 칭하였다.
중율(中栗) 2리
- 점거리 : 약 120년 전에 시장이 개설되었다 하여 점거리라 불린다.
- 신오봉 산소 : 양산신(羊山申)씨의 제 13대 손 신씨의 시조(始祖)의 묘가 있어서 이 산의 이름을 신오봉 산소라고 부른다.
청운(淸雲) 1리
- 조선 효종 때 의봉(義鳳) 귀봉(貴鳳) 비봉(飛鳳)의 삼 형제와 차대오(次代五)형제(兄弟)가 앞산인 범됨산이 화살이 들어오는 형곡(形谷)이라 하여 마을의 번창을 막고 있다 하여 이 살을 막기 위해 여기에 관덕헌(觀德軒)을 신축하였으며 후일에 활쏘기와 말타기의 무술도장으로 사용
청운(淸雲) 2리
- 1749년 청계소(淸溪沼)에는 맑은 물이 많이 모여 있고 하여 용이 살았다고 하며 이 소문에는 무한(無限)의 물고기들이 살고 있어서 동리(洞里)의 어부가 고기를 잡기 위하여 물 속에 들어가 보니 "이시미"가 있어서 고기를 잡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이시미"가 사 람의 눈을 뜨이게 되면 풍년이 들었다 한다.
검곡리(檢谷里)
- 장군묘(將軍墓) 고개 :1529년에 장군이 날터라 하여 임진왜란 시에 왜병(倭兵)이 사혈 (沙血)을 끊는다 하여 맥을 끊으니 이 고개 바위층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하여 지금도 여기에는 흰 차돌이 붉은 피가 물든 돌이 있어서 장군묘라 한다.
- 글쓴바위 : 성명미상의 승려가 바위에서 글을 썼다 하여 글쓴바위라 불린다.
용봉리(龍峰里)
- 이조(1780) 삼포당 상상봉(上上峰)에 정자를 지어놓고 기내(基內)에 탕관바위를 모시고 이 지점이 3개군(의성, 안동, 비안)민이 앞을 다투어 가며 탕관을 자기 군(郡) 쪽으로 향하게 하여 풍년이 들도록 기원하였으며 특히 이곳은 3개 군(郡)의 경계로서 탕관이 향하는 군 이 풍년이 들었다고 전하고 있고 여기에는 사찰(寺刹)이 있었다 하며 지금도 갖가지 꽃들 이 야생하고 기와장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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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 2024-05-24